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네스토르 마흐노 (문단 편집) == 생애 == [youtube(g8T_hafxdNk)][* 네스토르 마흐노의 민병대를 담은 유일한 기록영상이다.] > 우크라이나의 독립이란 얘기를 할때 우리 의미는 결코 (우크라이나 총재정부 수장) 시몬 페틀류라 같은 자와 같은 의미에서 '독립'이란 말을 하는게 아니다. 우리가 하는 얘기는 우크라이나 노동자와 농민들의 사회적 독립을 얘기하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우리는 우크라이나 민족은 '''다른 모든 민족과 마찬가지로, 독립된 나라로서가 아니라 독립된 노동자로서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표트르 아르시노프, 마흐노주의자 운동사 출처[* 인터넷에 전문이 올라와 있다. [[http://www.ditext.com/arshinov/makhno.html|#]]을 참고.] 1888년[* 1889년이라고 작성한 문헌도 있으나 그것은 그의 부모가 징병 기피를 위해 [[출생신고]]를 늦게 했기 때문이었다.] 소도시 훌랴이폴레(Гуляйполе)[* Г은 보통 g으로 발음하나 우크라이나어에서는 h로 발음한다.]에서 6남매(5남 1녀)중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10개월일때 죽었기 때문에 형편이 매우 곤궁했다. 그래서 7살부터 지주의 소와 양을 돌보는 일용직으로 살아갔고 8살에는 겨울에만 열리는 초등학교에 들어갔으나 12살에 자퇴하여 독일인 농장에서 일해야 했다. 이후 17살이 되자 주물공장에 취직한 그는 현지 아나키스트와 공산주의자가 만든 20명 정도가 속한 소규모 지하조직에서 아나키즘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거기서 경찰서를 습격하는 수용적 아나키즘 운동을 하다가 2년 후인 1908년 붙잡혀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모스크바로 압송된 이후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받게 된다. 그곳에서 1910년 표트르 아르시노프(Пётр Андреевич Аршинов)[* 본래는 볼셰비키 당원이었으나 아나키즘으로 전향하였다. 이후 마흐노와 함께 아나키즘 운동을 전개하였고 망명 후에는 그의 생애를 증언할 회고록을 집필하였다. 그러다가 1934년 다시 소련 정부의 허가를 받아 귀국하였으나 [[대숙청]] 시기 아나키즘 지하조직을 만들려 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에게서 체계적인 아나키즘 이론을 배웠고 교도소에서는 역사, 문학, 수학을 공부하였다. 이 시기 그는 여러 번 간수에게 저항하여 아홉번 가량 독방에 감금되었고 결국 이 과정에서 폐결핵을 앓게 된다. 1917년 3월 [[2월 혁명]] 시기 법무장관 [[알렉산드르 케렌스키]]는 치안유지법을 위반한 정치범 3만명을 일괄 석방한다. 이에 우크라이나로 돌아온 마흐노는 독자적으로 노동자와 농민을 규합하여 소비에트의 의장에 취임한다. 이후 우크라이나의 혼란으로부터 고향을 지키기 위한 흑위대를 결성한다. 그러나 이 소비에트는 내부의 경영갈등과 우크라이나에 진주한 오스트리아군 때문에 1918년 4월경 해산되고 말았다. 이후 볼가강을 거슬러 피난하다 6월경 모스크바로 간 마흐노는 [[블라디미르 레닌]]과 접촉했고 의견 차이로 갈등을 빚었으나[* 이는 아나키즘과 마르크스주의의 근본적인 시각차 때문이었다. 두 사상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이상은 비슷했으나 마르크스주의는 그걸 위한 프롤레타리아 독재 단계가 필요하다고 본 반면 아나키즘은 그러한 '중간 기간'을 새로운 채제를 위한 위선적 장치로 간주하였고 이 때문에 레닌은 마흐노를 '이기적이지는 않지만 현실을 파악할 줄 모르는 몽상가'로 판단했다.] 어쨌든 볼셰비키의 도움으로 다시 우크라이나로 돌아올 수 있었다. 훌랴이폴레로 돌아온[* 이때 [[카자크]]의 약탈로 인하여 도시는 페허가 되어 있었고 셋째 형은 수배 중이던 마흐노로 인하여 사살당하고 말았다.] 곧바로 민병대를 소집하기 시작해 항쟁에 돌입하였다. 그의 부대는 겨우 30여명 수준이었지만 우크라이나에 진주한 동맹국 군대나 카자크 부대와 승리를 여러번 거두었는데 마흐노의 부대가 적을 격퇴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기병대와 [[타찬카]]를 이용한 기동성 덕분이었다. 이후 1917년 9월 천여명의 오헝제국군을 격파한 디브리우카(Дібрівка)에서의 승리를 계기로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아나키스트들의 소규모 부대가 합류해 수천명 규모로 확장되면서 독립적인 정치활동을 시도할 정도로 커지게 된다. 마흐노의 군대가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은 우호적인 농민들에게 말을 교체받고 식료품을 공급받을 수 있었기에 보병이 다수였던 다른 부대보다 빠르게 기동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강철같은 의지와 날카로운 기지를 겸비한 마흐노"는 농민들의 지지를 받아 아버지(батько)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이후 1918년 11월 [[제1차 세계 대전]]이 종결될 무렵 퇴각하던 동맹군으로부터 많은 장비를 획득하고 훌랴이폴레를 점령한 마흐노는 자신의 본거지에서 자신의 사상을 실현할 기회를 노리게 된다.[* 본 문서의 최상단에 인용한 문서도 그때 발표된 것이다.] 1919년 1월부터 경제적, 군사적 문제를 논의하는 지역회의를 소집한 아나키스트들은 자발적인 동원 노동자 및 농민 및 군인을 위한 3개의 협의회 설치등을 논의하였다. 이후 아나키즘에 근거한 코뮌이 각지에 설치되었으며 그중 최초로 설치된 것은 순교한 혁명가인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름이 붙여졌다. 한편 이 무렵 볼셰비키들에게 탄압받던 아나키스트들이 우크라이나로 피신오자 그들을 받아주기도 하였다. 또한 우크라이나어 신문들이 발행되었으며 문화교육과 학교들이 새롭게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또한 '동맹'이었던 볼셰비키들이 식량 조달에 어려움을 겪자 그들을 위해 식량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짧은 황금기는 몇 달도 채 가지 못했다. 볼셰비키가 처음에 마흐노를 용인했던 것은 산업이 발달하지 않은 우크라이나에서 그가 별다른 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는데 예상을 뒤엎고 마흐노가 점차 세력을 불리자 이를 경계하게 되었던 것이다. 1919년 4월에 이미 볼셰비키는 새로운 회의를 열지 말 것을 경고했으나 마흐노는 이를 무시했다. 결국 5월 우크라이나에서 볼셰비키에 반하는 반란을 일으킨 그리고리예프(Григорьев)에 대한 대응을 마흐노가 거부하면서 충돌이 시작되었다. 이후 6월 적군이 훌랴이폴레를 공격하여 코뮌의 해체를 명령하였고 며칠 후 [[안톤 데니킨]]의 백군이 도착하면서 이들을 싹 없애버리고 말았다.[* 백군의 목표는 구 질서 회복으로서 민족 독립, 토지 개혁, 노동자의 공장 장악 모두에 적대적이었다.] 크림 반도 근방의 헤르손으로 퇴각한 마흐노는 그리고르예프를 사살하고 자원병을 받아들여 세력을 재정비하였다. 그곳에서 마흐노는 라다 정부와 협상하여 공동으로 백군과 투쟁하기로 합의했으나 이행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에게 밀려 우크라이나 서쪽지역까지 철수해야만 했다. 한편 그 무렵 [[안톤 데니킨]]은 모스크바를 공격하여 내전을 끝내고자 하였다. 이에 볼셰비키 측은 ~~뻔뻔하게도~~ 흑군에게 지원을 요청하였고 아나키스트들은 백군이 승리하는 것보다는 공산주의자가 이기는 것이 낫다는 인식에 이에 동의하게 된다. 이에 1919년 9월 1일 우크라이나 혁명반역군을 선포한 마흐노는 9월 26일 페레고노브카에서 데니킨의 군대를 격파해 보급로를 차단하는데 성공한다. 이에 데니킨은 최정예부대를 철수시켜야 했고 이를 기점으로 데니킨의 군대는 쇠락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마흐노는 다시 우크라이나 중부로 이동하여 아나키즘에 근거한 사회를 건설하고자 노력하였다.그러나 1919년 말 마흐노는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으로 인한 [[폴란드 제2공화국|폴란드]] 전선 이동명령을 마흐노가 거부하면서 둘의 관계는 다시 파토났고 반년 이상 전투가 이어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표트르 브란겔|브란겔]]의 군대가 다시 크림 반도에서 북상하기 시작하면서 다시 한번 동맹이 체결되었다. 동맹의 대가로 볼셰비키들은 억류하고 있던 아나키스트들을 석방시키고 소비에트 정권을 무력 전복을 시도하지 않는 선에서의 선전의 자유도 보장되었다.[* 한편 브란겔 역시 광범위한 토지개혁을 약속하는 대가로 볼셰비키와의 공동전선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마흐노는 사절단을 처형했다.] 이 짧은 동맹은 단 한달만에 다시 폐기되었고 다시 적군은 마흐노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내전에서 완전히 우위를 점한 볼셰비키는 더 이상 그들이 필요하지도 않았고 우크라이나 농민들 스스로 [[스테판 라진]], [[예멜리안 푸가초프]][* 각각 제정시대 농민반란을 선동했던 자들이다.]라고 부르는 마흐노를 내버려 두는 것은 소비에트 정권에 있어 위협적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적군은 35만 대군을 동원하여 흑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고 가장 전성기에 달했을 때도 5만명 정도에 불과했던 혁명반역군은 각개격파당하고 말았다. 결국 유격전을 펼치던 마흐노마저도 얼굴과 발에 부상을 입고 수십여명만 남아있던 소부대는 치료를 위해 1921년 [[루마니아 왕국]]으로 도피할 수밖에 없었고 이로서 우크라이나 자유지구는 붕괴하였다. 마흐노는 이후 [[폴란드 제2공화국|폴란드]]에 망명하였으나 마흐노의 존재를 눈엣가시로 여긴 폴란드 정부가 그를 추방하였다. 1924년 독일인 지주들을 학살한 혐의로 [[단치히 자유시|단치히]]에서 체포되었으나, 재판이 벌어지기 전에 탈옥하여 도주하였다.[* 소련에 의하여 불법적으로 납치되었다가 베를린의 소련 대사관에 들어가기 직전 탈출한 것이라는 증언도 존재한다.] 이후 버크만의 초빙으로 1925년 파리에 정착한 마흐노는 극장에서 목수 생활을 하다가 르노 자동자의 노동자로 일하며 살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발에 입은 부상이 도지면서 노동을 할 수 없게 되어 그의 아내가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결국 그의 아내와 딸은 마흐노를 떠났으며 그 이후에는 각지에서 아나키스트들의 도움으로 연명하였다. 파리에서 아나키스트와 교류하던 마흐노는 자유지구의 실패가 아나키스트들의 단결력의 부족에 있다고 판단해 아나키스트 조직을 설립하고자 시도했으나 "아나키적 볼셰비키"이라며 아나키스트들에게 비판받았다.[* 이것이 그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요인이 되었다. 보통 아나키즘은 권위를 부정적으로 보기 때문에 그러한 가능성을 내포한 조직마저 부정하지만 볼셰비키들의 숙청을 직접 경험한 마흐노는 그런 '종이 위의 혁명'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현재의 주류를 차지하는 아나코생디칼리슴, 아나코코뮤니즘 분류와는 다르게 저 시대에는 크로포트킨 계열의 사회적 아나키즘 부류는 소수였으며 대다수는 반란적 아나키즘이 다수였다.] 말년에는 [[스페인]]에서 아나키스트 민병대를 지휘해 달라는 권유를 받았으나 부상으로 인하여 거부하였다. 이후 영양실조로 인한 폐결핵이 재발해 병사하였다. 한 사람의 동료만이 지켜본 쓸쓸한 최후였으며 시체는 화장되어 공동묘지에 안치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